top of page

[태형지민/뷔민] 첫사랑


[태형지민/뷔민] 첫사랑

김태형은 생각보다 비밀이 많았다. 나름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, 나에게 숨기려는 것이 많았다.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, 나와 김태형을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방에 모여 진실게임을 했다. 빈 삼다수 물병이 돌아가다가 뚜껑 부분이 김태형을 가르키며 멈췄다. 오오- 김태형이.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흔한 질문이었다.

" 현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? "

김태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. 뭐야, 얘 나한테 숨기고 있던 거야? 난 김태형을 일으키고 함께 밖으로 몰래 나갔다.

" 야. 너 좋아하는 애 누군지 불어. "

" 비밀이야. "

솔직히 서운했다. 나는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들은 모두 김태형에게 알려줬었다.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승희가 알고보니 김태형을 좋아한다는, 그런 참담한 소식을 듣고도 난 김태형에게 웃어줬다. 근데 이 새끼는.

" 그게 뭐야. 서운하다. "

건조한 웃음을 뱉으며 김태형은 들어가자. 춥다. 하며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.

그렇게 김태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졸업을 할 때까지 몰랐다. 김태형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같은 학교였는데 대학교는 각자 다른 곳을 가게 되었다. 졸업식 날에 김태형은 날 껴안고서 펑펑 울었다. 물론 나도 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-사실 김태형보다 더 울었다- 평소에 잘 울지 않던 김태형이 마치 내일 군대라고 갈 기세로 우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. 김태형과 나는 같은 교복을 입고서 마지막으로 함께 먹을 저녁으로 간단히 짜장면을 골랐다. 훌쩍거리며 짜장면을 뒤적이는 김태형에게 슬쩍 물었다.

" 너. 그 때 좋아한다는 사람, 아직도 좋아하냐. "

" .. 응. "

누군지 말 안 할꺼지, 내 물음에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. 나도 모르겠다. 짜장면을 크게 한 입 먹었다. 우물거리며 창문 밖을 한 번 봤다. 저녁 노을이 예뻤다. 곁눈질로 김태형을 슬쩍 봤다. 김태형은 빨개진 눈으로 노을이 아닌, 날 보고 있었다. 잘생겼네, 새끼. 뭘 봐, 조금은 삐졌다는 걸 티내며 퉁명스레 말했다. 김태형은 휴지를 뽑아 내게 내밀었다.

" 입에 묻었다고. "

대학에 가고나니 김태형과 나는 자연스레 멀어졌다. 카톡이나 페북으로 보이는 김태형은 정말로, 행복해보였다. 중학교 때 우리가 처음으로 스마트폰을 접한 후로 김태형은 날마다 나에게 카톡을 보냈었다. 내가 자는 사진이나 웃기게 나온 사진을 보내든, 정말 짜증나게 비둘기 사진을 보내고서 ' 우리집 베란다에 비둘기 왔어. ' 라는 쓸데없는 말이든, 아님 자기가 마치 구남친이라도 되는 듯이 ' 자..? ' 하고 아련한 말을 보내든 김태형은 항상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. 그래서 그런지 원래 내가 먼저 연락을 한 적은 없었는데. 김태형이 하도 안 하니 괜시리 서운해서 내가 먼저 해보았다.

' 태태. 잘 지내? '

' 왜 연락이 없어. 서운하다 새끼야 ㅋㅋ '

' 어. '

' 요즘 좀 바쁘네. '

' 바쁘다고 카톡 한 줄 못 보내? '

' 태태 너 설마 나보다 더 좋은 친구 생겼냐. '

그렇게 대화는 끊겼다. 몇 년 친구도 아닌 10년 친구와 이렇게 건조해지다니. 괜히 회의감이 들었다.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전화가 울렸다. 만나자는 대학 동기들의 연락이었다.

대학가에 나와 선배들이 추천하였던 술집에 들어갔다. 술을 잘 못 해서 술잔을 거부하자 짓궂은 동기들은 술게임을 제안하였다. 아, 나 게임엔 젬병인데.

" 바니바ㄴ, 아니. 아! "

몇 잔 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하였다. 술이 들어갈수록 몽롱해지는 정신에 벌칙은 계속 내가 당첨되었다. 술만 마시는 것은 재미없다며 동기들은 새로운 벌칙을 제안하였다. 지민아, 저-쪽 테이블에서 제일 예쁜 애 번호 좀 따라. 내 엉덩이를 몇 번 토닥거린 동기들은 내 등을 떠밀었다.

쭈볏거리며 다가갔다.

" 저기.. "

아씨, 김태형이랑 10년 친구를 하면서 욕도 배우고 게임도 배우고 많이 배웠는데. 낯가림 없애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.

" 박지민? "

누군가 나를 불렀다. 뿌연 시야에도 뚜렷히 보였다.

" .. 김태형? "

김태형은 내 손을 잡아 끌며 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. 술집 뒤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. 가로등 불이 깜빡거렸다. 가로등 불 주변으로 나방들이 모여있었다.

" .. 오랜만이다. 김태형. "

" 너, 술도 못 하면서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? 너 집도 멀잖아. "

연락도 안 하던 자식이 내 걱정을 하니 웃겼다.

" 너한테 진짜 서운하다. 좋아하는 사람도 숨기고, 연락도 먼저 안 하고. 진짜.. "

말을 하다가 서러워져서 나도 모르게 울먹였다.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다보니 김태형은 굳은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고있었다. 결국 눈물을 보였다. 김태형은 당황한 듯 했다.

" 너 우냐? "

허리를 숙여 김태형은 고개를 숙인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. 보지 마, 하며 미니까 내 손을 꽉 잡으며 날 본다. 허, 한숨을 한 번 쉬더니 김태형은 조용히 말했다.

" 야, 박지민. "

" ...... "

" 내가 좋아한다는 사람, 궁금해? "

" ...... "

" 내 첫사랑이 너야. "

말을 뱉고서 시발, 하고 욕을 낮에 중얼거린 김태형은 날 두고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.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. 길거리에 김태형의 발자국이 남은 것 같았다. 잠만. 내 첫사랑은 누구지, 잠시 고교 시절 회상에 빠졌다.

김태형은 친구지만, 사실 정말 멋졌다. 초등학교 때부터 김태형은 인기가 많았다. 잘생긴 외모는 여자 애들을, 순하고 독특하고 낯가림 없는 성격은 남자 애들을 끌었다. 그 옆에 난 항상 가만히 있었다. 내가 어떻게 김태형이랑 친해졌더라.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. 새로 받은 반 배정에 아는 친구가 없었다. 안 그래도 낯을 심하게 가리는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. 반 아이들의 이름은 이미 다 외웠다. 하지만 내 이름을 아는 아이는 없는 듯 했다. 그 때, 내 옆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. 옆을 보니 짝꿍이 아니었다. 김태형. 가장 눈에 띄던 아이였다.

" 안녕. 지민아. "

내 이름 아는구나.

" 너 내 이름 알아? "

알지만 모른 척 했다.

" 난 태형이야. 김태형. "

김태형의 까만 손이 내 손을 잡았다.

"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. "

그 후로 김태형은 항상 날 챙겼다. 다른 반이 되어도 쉬는시간과 점심시간마다 날 보러 와줬다. 덕분에 날 좋아해주는 친구들도 많아졌다. 그렇게 김태형은, 내 옆에 항상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런 친구가 되었다.

어느 날이었다.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. 운이 좋게 김태형과 나는 같은 반이 되었다. 키가 꽤나 큰 김태형은 농구부에 들었다.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김태형을 교실 창문으로 내려다봤다. 맨날 보던 모습인데 갑자기 그 날따라 김태형이 멋지게 보였다. 반팔티로 이마의 땀을 닦는 모습이 정말로 멋졌다. 김태형은 세수를 한 번 하고서 교실로 들어왔다. 멍을 때리며 김태형을 보니, 김태형이 내 앞에 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.

" 뭔 생각 하냐. "

어, 어? 갑자기 보이는 김태형에 당황하였다. 김태형은 그런 나를 보고서 귀여워- 라고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. 아까 멋지다고 느꼈던 김태형이어서 그런지 괜히 설레였다. 맨날 하던 행동인데, 분명히.

그 날의 짧은 설레임은 그냥 넘겨버렸다. 일부러 잊으려고 했다.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, 짧은 설레임이 아니었다. 만약 김태형이 좋아한다는 아이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애나 남자애였으면. 난 어쩌면 펑펑 울었을 지도 모르겠다.

그렇다. 내 첫사랑도 김태형이다.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. 그리고 김태형의 뒤를 급하게 따라갔다. 가게로 들어가려는 김태형을 불렀다.

" 김태형! "

김태형은 놀란 눈으로 날 보았다. 갑자기 뛰어서 자꾸 숨이 찼다. 침을 몇 번 삼켰다. 심장이 쿵쾅 뛰었다.

" 내가 잘 생각해봤는데 나도 사실, 아니. 사실 나도. "

첫사랑이 너야.


bottom of page